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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주시 (양동마을 관광)
    관광지 여행 2013. 10. 13. 16:58

     

    경주양동마을 관광 (경주시)

    전통 마을 가운데 가장 큰 규모와 오랜 역사를 자랑하며, 2010년에 하회마을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경주양동마을은 조선시대 반촌(유교중심마을)이다. 월성 손씨, 여강 이씨 양대 가문에 의해 형성된 마을로 훌륭한 재상들과 많은 유학자들을 배출했다.
    경주시 북쪽 설창산 아래 오백년이 넘는 고색창연한 54호의 대규모 고택과 110여 호의 초가로 이루어져있다. 양동마을 내에 보물이나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곳은 모두 15가옥인데 가장 오랜 집은 서백당(書百堂)으로 추정된다. 대체로 종가는 산등성이의 높고 넓은 터에 위치하고 파종가들은 좀 낮은 자리에 위치하는 반가의 배열 법도가 지켜져 있다.

     

     *여행일자 : 2013년 10월 12일 

     

     ▲ 양동마을 안내도 

    *탐방코스 : 정충비각 - 관가정 - 향단 - 이향정 - 심수정 - 강학당 - 수졸당 - 서백당 - 낙선당 - 창은정사 - 수운정 - 무첨당 - 물봉동산 (노란 테두리 된 곳이 탐방한 곳임)

     

     

     

    매표소 지나면 나오는 양동초등학교

     

     

     

    마을 입구에 다양한 체험행사장을 마련해 놓았다 

     

     

     

    마을 입구에 연꽃밭이 크게 조성되어 있다

     

     

     

     길 왼쪽에 관가정이 길 오른쪽에 향단이 보인다

     

     

     

    정충비각

    낙선당 손종로는 광해군 10년(1618년) 무과에 급제하여 남포현감을 지냈으며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노비를 데리고 전투에 참가했다. 최전선에서 용감하게 싸우던 그는 경기도 이천의 쌍령전투에서 그를 수행했던 충직한 노비 억부와 함께 전사했는데, 시체조차 찾지 못했고 옷가지로 겨우 초혼장을 지냈다고 한다.
    나라에서는 정조 7년(1783)에 왕명을 내려 38세의 젊은 나이에 전쟁터에 나아가 순절한 손종로를 기리기 위해 왼쪽에 ‘정충각’을, 노비 억부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오른쪽에 ‘충노각’을 각각 세웠다.

     

     ▲ 정충비각

     

     

     

     손종로를 기리기 위한 ‘정충각’

     

     

     

    관가정으로 가다 마당에서 일하시는 분을 살짝 찍었다 - 죄송합니다 

     대문이 따로 없는 집 입구에 꽃이 예쁘게 피어있다

     

     

     

    관가정 가는 길의 큰 은행나무 두 그루 

     

     

     

    은행나무 옆에서 본 갈대가 예쁘게 피어있는 안락천

     

     

     

    관가정 (보물 제442호)

    조선 중종 때 청백리로 유명했던 우재 손중돈(1463~1529)이 분가하면서 지은 집이다. 대문과 연결된 사랑채의 앞면이 트인 누마루에는 ‘관가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관가정(觀稼亭)의 이름에는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보듯이 자식들이 커가는 모습을 본다”는 뜻이 담겨 있다.

     

     관가정 입구

     

     

     

    출입문에서 밖으로 내다 본 경치 

     

     

     

     ▲ 관가정

     

     

     

     

     

     

     

     관가정의 오래된 향나무

     

     

     

    관가정의 와송

     

     

     

    향단 (보물 제412호)

    조선 중기의 기와집이다. 조선 5현중 한 분인 유학자 회재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의 집이다. 1540년쯤 이언적이 모친의 병환을 돌보기 위해 낙향하려고 하자, 중종은 그를 경상도 관찰사로 재수하여 나랏일도 하고 어머니도 돌볼 수 있도록 배려하고, 이 집도 지어주었다고 한다. 처음엔 99칸의 규모였으나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으로 일부가 불타 없어져 지금은 51칸만 남아 있다.

     

     향단의 출입문 - 문이 잠겨있어 내부를 구경할수 없다

     

     

     

    향단 내부 모습 - 4년전 가족여행 갔을때 찍은 사진임

     

     

     

    향단 앞에서 본 경치 - 뒷쪽 산봉우리는 성주봉이다 

     

     

     

     향단 전경

     

     

     

    이동 하면서 본 감이 익어가는 경치 

     

     

     

    앞 사진의 담장에 있는 홍시를 당겨서 봄 - 나비들이 맛있게 식사를 하고 있다

     

     

     

     

     

     

     

    이향정 (중요민속문화재 제79호)

    이 집은 온양 군수를 지낸 이향정 이범중(李範中)이 숙종 21년 1695년경에 지은 것으로, 그의 호에서 집의 이름을 따왔다. 담장을 따라 올라가는 오솔길에는 초여름이면 찔레꽃이 만발하여 그윽한 향기를 풍긴다.

     

    이향정으로 올라가는 길에 코스모스가 예쁘게 피어있다 

     

     

     

     ▲ 이향정

     

     

     

    살림을 살고있는 이향정 내부의 모습 - 주인의 허락을 받고 들어갔다

     씨 옥수수와 땅콩이 걸려있는 것이 정겹다

     

     

     

     이향정의 디딜방아

     이 집도 옛날에 부잣집이었다고 한다

     

     

     

     이향정의 감나무

     

     

     

    심수정 (중요민속문화재 제81호)

    명종 15년(1560)에 형을 위해 벼슬을 마다하고 노모를 봉양한 회재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의 동생 농재 이언괄을 추모하기 위해 여강이씨 문중에서 세웠다. 지금의 정자건물은 철종 때 불에 타서 1917년경 다시 지은 것이다. 양동마을에는 손씨와 이씨 문중에서 세운 정자가 여럿 있는데, 그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안락정과 강학당이 세워지기 전까지 이 마을의 서당역할을 했다고 한다.

     

     심수정으로 올라가다 본 먹음직스러운 홍시

     

     

     

     심수정의 담장에 큰 나무가 이 집의 연륜을 말해주는것 갔다

     

     

     

     ▲ 심수정

     

     

     

    위에서 아래로 본 심수정 

     

     

     

    심수정에서 보는 전망이 좋다

     

     

     

    강학당 (중요민속문화재 제83호)

    조선 후기에 지어진 서당이다. 고종 4년(1867)에 지어진 여강 이씨의 문중 서당이다.

     

     ▲ 강학당

     

     

     

    강학당에서 본 향단의 모습

     

     

     

     이동하면서 본 길가의 큰 나무

     

     

     

     우물체험 집

     

     

     

     우물체험 집 지붕위의 호박

     

     

     

    우물을 한 두레박 떠서 목도 축이고 손도 시원하게 씻었다  

     

     

     

     우물체험집에서 가까운 곳의 모습인데 왼쪽의 작은 초가집이 궁금해서 가 보았다

     

     

     

    앞 사진의 왼쪽 초가집은 재래식 화장실이었다 

     

     

     

     수졸당으로 올라가다 언덕에서 본 경치가 참 좋다

     

     

     

    수졸당 (중요민속문화재 제78호)

    조선 광해군 8년(1616년) 이언적의 손자 이의잠이 건립하였다

     

    수솔당으로 올라가는 길은 약간 가파르지만 새들의 지저귐 소리가 좋다 

     

     

     

     수졸당은 한적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수졸당의 낮잠자는 백구

     

     

     

    서백당 (중요민속문화재 제23호)

    조선시대 가옥으로 양동마을에 자리한 월성 손씨 종가집이다. 양동마을에서 시조가 된 양민공 손소(1433~1484)가 지었으며 서백당은 이 집에 속한 사랑채의 이름이다. 손소의 둘째 아들인 손중돈의 외손이며 동방오현으로 불리는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종가로서의 규모와 격식을 갖춘 큰 가옥이며 사랑마당에는 세조 2년(1456) 집을 새로 지은 후 손소가 심었다는 향나무가 있다.

     

    서백당 입구 모습 

     

     

     

     ▲ 서백당

     

     

     

     

     

     

     

    서백당의 약600년된 향나무 

     

     

     

     서백당의 담장에 심어져 있는 난

     

     

     

    낙선당 (중요민속문화재 제73호)

    조선 중기에 지어진 민가로 양동마을에 자리한다. 월성 손씨 손소의 셋째 아들인 망재 손숙돈이 분가할 때 지은 집이다. 낙선당은 병자호란때 순절한 낙선당 손종로(1598~1636)의 호이기도 하고 조선 중종 35년(1540)에 지은 사랑채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 집의 주인이 천석꾼이었다고 하는데, 유난히 많은 곳간과 곡식을 찧었던 디딜방아채의 모습에서 그 흔적을 엿볼수 있다.

     

     낙선당

     

     

     

    창은정사

    창은정사는 철종 11년에 창은 이남상(李南祥)이 건립한 주택으로 'ㅁ'자 형태의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정교한 건축양식으로 건축학을 공부하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관심의 대상이기도 하다. 일반집으로는 드물게도 정자(내곡정)를 가지고 있다.

    내곡정(정자)은 본체와 조금 떨어진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창은정사 입구의 우스광스러운 돌비석

     

     

     

    창은정사의 부엉이 

     

     

     

     ▲ 창은정사는 정원이 참 예쁘다

     

     

     

    창은정사의 석류나무 

     

     

     

     창은정사의 탐스럽게 익은 석류 

     

     

     

     이동하면서 언덕에서 본 안강평야(양동들)의 황금들녘

     

     

     

    수운정 (중요민속문화재 제80호)

    선조 15년(1582)에 세운 정자로 양동마을에 자리한다. 청허재 손엽(1544~1600)이 지었으며 ‘수청운허’, 즉 ‘물과 같이 맑고 구름과 같이 허무하다’라는 글자에서 ‘수’자와 ‘운’자를 따서 정자 이름을 짓고 ‘청’자와 ‘허’자를 따서 본인의 호로 삼았다고 한다.

    청허재 손엽은 어린 나이에 이미 경주일대의 시를 짓는 경연에서 이름을 날렸다. 그 후 학문에 빛을 발하는 청년으로 자라나 사마시에도 합격했으나 대과응시의 뜻을 접고 당대의 석학들과 교제하면서 학문토론과 연구에만 몰두했던 인물이다. 명망있는 집안의 자제로 공명의 길을 ‘그저 뜬구름에 불과할 뿐’이라는 초연함으로 일관한 그는 고향마을에 수운정을 지었다.

    세상사에 초연했던 그를 세상 속으로 끌어냈던 것은 전쟁이었다. 임진년 그의 나이 49세에 왜구가 부산을 거쳐 양산, 경주로 쳐들어왔고 그는 경주 집경전에 있던 태조대왕의 어영(御影)을 수운정으로 임시 옮기고 향교 대성전의 위패를 옥산서원으로 옮기는 일에 참여했다. 그리고 곽재우, 유성룡, 정경세 등과 화왕산 맹약을 맺고 의병에 참여해 군량미를 조달하고 경주를 지키는데 전력을 다했다. 나라에서 그에게 벼슬을 내렸지만 전란이 평정되자 그는 조용히 고향 수운정으로 돌아와 학문에만 정진하다 일생을 마쳤다. 그와 교류했던 지산 조호익은 묘지명에 “덕의 광채가 아름답고 도의 맛이 고량의 진미와 같다”고 적었다.

     

     수운정 입구

     

     

     

    수운정의 뒷쪽 현판 흘림체 글씨가 멋지다 

     

     

     

    수운정에서 본 안락천 및 안강평야(양동들)의 황금들녘

     

     

     

    무첨당 (보물 제411호)

    조선 중기의 기와집이다. 조선의 성리학자 회재 이언적(1491~1553)이 경상감사를 지내던 1540년 무렵에 지은 여강 이씨 종가집이다. 무첨당(無添堂)은 회재 이언적의 맏손자인 이의윤의 호로 ‘조상에게 욕됨이 없게 한다’는 뜻이다. 손님접대와 책읽기, 쉼터 등의 용도로 쓰였다.

     

    무첨당 입구 모습 

     

     

     

     ▲ 무첨당

     

     

     

    무첨당 뒷편에는 사당이 있다 

     

     

     

    앞 사진의 우측 기와집의 와송에 꿀을 따는 벌들이 바쁘다 

     

     

     

    이동하여 물봄동산에서 보니 뒷편에 무첨당이 보인다 

     

     

     

     ▲ 이 집에서 식사 및 약과를 구입했다

     

     

     

     ▲ 마을 입구에 있는 100년넘은 양동점방

     

     

     

     ▲ 양동마을 구경을 다하고 양동점방에서 커피 한 잔을 사 마셨다

     

     

     

     

    ▲ 기념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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